슈무루 양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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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슈무루 양구리는 혼춘 출신의 동해여진 쿠르카부 추장의 아들로,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누르하치에게 귀순했다. 누르하치의 사위가 되었고, 명나라와의 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워 명장으로 평가받았다. 병자호란에 참전하여 조선에서 전투를 벌였으며, 광교산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사망했다. 숭덕제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무훈왕으로 추봉하고 비를 세웠으며, 강희제와 옹정제는 그의 공적을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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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무루 양구리 | |
---|---|
인물 정보 | |
이름 | 양구리 |
만주어 이름 | ᡧᡠᠮᡠᡵᡠ ᠶᠠᠩᡤᡠᡵᡳ (šumuru yangguri) |
한국어 음역 | 서목록 양고리 |
출신 부족 | 슈무루 할라 (舒穆禄氏) |
활동 시기 | 명나라 말기 ~ 청나라 초기 |
생애 | |
주요 활동 | 누르하치를 섬겨 공을 세움 |
관직 | 1등 대신 (一等大臣) 5대 대신 (五大臣) |
주요 공적 | 저격격전 (著 крепости Геке) 전투 승리 사르후 전투 참여 영원성 전투 (寧遠城戰鬥)에서 공을 세움 |
작위 | 신용공 (信勇公) |
사후 | 시호는 충의(忠毅) 옹정제 때 왕으로 추봉됨 |
관련 기록 | 태조고황제실록 (太祖高皇帝實錄) 태종문황제실록 (太宗文皇帝實錄) 세종헌황제실록 (世宗憲皇帝實錄) 흠정팔기통지 (欽定八旗通志) 고종순황제실록 (高宗純皇帝實錄) 국조기헌류징초편 (國朝耆獻類徵初編) 청사고 (清史稿) |
가계 | |
출신 지역 | 훈춘 (琿春) 지방 (일부 기록에는 쿠르카 (庫爾喀) 지방) |
참고 | 『팔기만주씨족통보 (八旗滿洲氏族通譜)』에서는 쿠르카 지방 출신으로 기록됨 |
2. 생애
동해여진 쿠르카부(庫爾喀部, Kūrka Aiman) 추장 랑주(郎柱)의 아들로 혼춘에서 태어났다. 랑주는 누르하치를 지지하여 두터운 대우를 받았으나, 쿠르카 부 내의 다른 사람에게 살해당했다. 당시 14세였던 양구리는 직접 아버지를 살해한 관인을 죽이고, 어린 동생 남타이(納穆泰, Namtai)를 업은 모친과 함께 일족을 이끌고 누르하치에게 귀순했다.[10] 그 후 아버지의 원수를 찾아내어 직접 칼로 베고, 그 귀와 코를 베어 먹었다고 한다.[11]
귀순 후 양구리는 누르하치의 딸을 아내로 맞아 그의 사위(에푸)가 되었고, 돌격대장으로 활동하였다.[10] 1619년 명나라 장수 두송과 마림의 군대를 격파하는 등 많은 공적을 세워 명장으로 평가받았다.
홍타이지 치하에서 양구리는 주로 명나라 정벌과 조선 침략에서 활약했다. 1636년 병자호란에 참전하였다.
1637년 11월, 숭덕제는 양구리를 무훈왕(武勳王)으로 추봉하고, 길에 비묘(碑墓)를 세웠다. 1700년 강희제는 양구리의 공적을 기리는 비를 건립했다. 1731년 옹정제는 양구리 가문의 세작(世爵)을 일등영성공(一等英誠公)으로 정했다. 양구리의 아들은 둘인데, 장남 아합단(阿哈旦)은 군공으로 타사라합번(拖沙喇哈番)을 제수받았고, 차남 탑첨(塔瞻)은 초품공(超品公)을 세습하고 내대신(內大臣, Dorgi Amban)에 발탁되었다.[35] 무양공(武襄公) 렁거리(楞額禮, Lenggeri)는 그의 동생이었다.
2. 1. 누르하치 시대
혼춘의 동해여진 쿠르카부(庫爾喀部, Kūrka Aiman) 추장의 아들로 태어난 양구리는 14세 때 부친이 관인에 의해 살해되자 직접 그 관인을 죽이고, 어린 동생 남타이(納穆泰, Namtai)를 업은 모친과 함께 일족을 이끌고 누르하치에게 귀순했다.[10] 귀순 후 누르하치의 딸과 결혼하여 그의 사위(Efu)가 되었고, 돌격대장으로 활동하였다.[10]양구리는 뛰어난 재능으로 누르하치의 신임을 얻어 팔기 제정 이후 만주 정황기에 편입되었다.[12] 압록강(야르 울라) 주둔을 명받아 엄격한 경비를 수행했으며, 이후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특히 1619년 명나라 장수 두송과 마림의 군대를 격파하는 등 명장으로 평가받았다.[25] 누르하치는 양구리에게 팔왕(베이레) 다음가는 지위와 1등 총병관 직위를 주고 좌익 병사 통솔을 명했으나, 전투 중 입은 상처를 고려하여 종군 책임을 면하게 했다.
양구리의 주요 참전 기록은 다음과 같다.
연도 | 사건 |
---|---|
1593년 | 10월: 주사리(백산 샹걘아린부) 침공.[18] 윤11월: 뇌은(네옌부) 침공.[19] |
1595년 | 6월: 호이파 다벽성(도비호톤) 공략.[20][10] |
1598년 | 안저라쿠 침공. |
1599년 | 하다 토벌.[21][10] |
1607년 | 1월: 울라의 주장 복도 참벌 (→오갈암 전투).[22][10] 5월: 악집(웨지부) 혁석흑(헤시헤) 침공. 9월: 휘발성(호이파 호톤)을 공략하여 국주 맹게불을 포박 (→태조 멸 휘발국).[23][10] |
1611년 | 목륜 침공. |
1612년 | 울라하(울라 빌라) 전투.[24][10] |
1613년 | 울라 토벌.[24][10] |
1619년 | 2월: 살르후 전투.[25][10] 철령 침공. |
1621년 | 심양, 요양 침공. |
1625년 | (내용 없음) |
1627년 | 정묘호란 |
1637년 | 병자호란 |
2. 2. 홍타이지 시대
1619년 명나라의 장수 두송과 마림의 군대를 격파하는 등 많은 공적을 세워 명장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1636년에는 병자호란에 참전하였다.[34] 홍타이지 치하에서 그는 주로 명나라 정벌과 조선 침략을 통해 다시금 힘을 발휘했다.조선에 들어간 양구리는 남한산성으로 향하는 충청도 감사 정세규의 근왕군을 기습하여 최진립, 이상재, 김홍익 등 다수의 군관을 전사시키고 의병장 이민진을 포로로 잡은 뒤 참수했다(험천 전투).[34] 그 후에는 전라도 병사 김준용의 전라도 근왕군을 요격하였다(광교산 전투). 그러나 조선군의 기세가 날카로워 첫 전투에서 대패하자 군대를 물리고 다시 조선군을 기습하려 하였으나 이 작전마저도 실패로 돌아갔다. 격노한 양구리는 그 다음날 직접 군대를 이끌고 조선군을 총공격하여 조선군과 백병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양구리 휘하의 장수 2명이 전사했고, 양구리도 난전 중에 조선군의 저격을 받고 큰 부상을 입고 죽었다.[34] 김준용 묘명에 이르길, "오랑캐 장수 하나가 탄환에 맞아 죽었는데, 적군이 모두 통곡하였으므로 어떤 장수가 죽었는데 저처럼 통곡을 하는가 하고 괴이하게 여겼다. 나중에 한흥일(韓興一)이 청에 사신으로 가자, 청인들이 '동국과의 전쟁에서는 광교산의 전투가 가장 치열하여 백양고라(白羊高羅)가 죽었다.'라고 하였다. 백양고라라는 자는 관직이 높고 또 용략(勇略)이 있어 무오년에 요동을 함락시킨 자였다."라고 적고있다.
화석예친왕(和硕豫親王, Hošoi Erke Cin Wang) 도도(多鐸, Dodo)가 양구리의 시신을 거두어 왔다고 한다.《태종문황제실록(太宗文皇帝實錄)》 1637년 1월 8일 기사에 따르면, 숭덕제가 양구리의 시신을 마주 붙들고 곡하고 애통해하니, 신하가 누차 그만하시라 권하였으나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34]
이해 11월에, 양구리는 숭덕제에 의해 무훈왕(武勳王)으로 추봉(追封)되었고, 길에 비묘(碑墓)를 세웠으며, 1700년 강희제는 다시 양우리의 특출난 공적을 글로 써서 비를 건립하였다. 1731년, 옹정제는 양우리 가족의 세작(世爵) 일등영성공(一等英誠公)으로 정하였다. 양구리의 아들은 둘인데, 장남은 아합단(阿哈旦)으로, 군공(軍功)으로써 타사라합번(拖沙喇哈番)을 제수받았고, 차남은 탑첨(塔瞻)으로, 초품공(超品公)을 세습(襲)하였고, 내대신(內大臣, Dorgi Amban)에 발탁되었다.[35] 일등총병관(一等總兵官)을 역임하였던 무양공(武襄公) 렁거리(楞額禮, Lenggeri)는 그의 동생이었다.
천총 8년(1634년) 5월 임인 17일에는 공훈으로 좌익 초품 일등공 (종실 베이러 다음 가는 지위, 외신의 최고위)에 서작되었으며, 더 나아가 "세습 불체"로 지정되었다.[5]
천총 9년(1635년) 정월, 공신의 요역 면제가 결정되었으며, 아울러 양구리는 니루 2개 조의 전관을 명령받았다.[13]
천총 10년(1636년) 2월 13일, 홍타이지는 신하의 관식을 제정했고 (관면 위의 금 장식으로 계위를 구분), 양구리와 종실 피양에게는 "함동주금정"가 하사되었다.[14]
'''양구리의 주요 참전 목록'''
2. 3. 병자호란과 죽음
1636년 병자호란에 참전하였다.[34] 양구리는 남한산성으로 향하는 충청도 감사 정세규의 근왕군을 기습하여 최진립, 이상재, 김홍익 등 다수의 군관을 전사시키고 의병장 이민진을 포로로 잡은 뒤 참수했다(험천 전투).[34]그 후에는 전라도 병사 김준용의 전라도 근왕군을 요격하였다(광교산 전투).[34] 그러나 조선군의 기세가 날카로워 첫 전투에서 대패하자 군대를 물리고 다시 조선군을 기습하려 하였으나 이 작전마저도 실패로 돌아갔다.[34] 격노한 양구리는 그 다음날 직접 군대를 이끌고 조선군을 총공격하여 조선군과 백병전을 벌였다.[34] 이 전투에서 양구리 휘하의 장수 2명이 전사했고, 양구리도 난전 중에 조선군의 저격을 받고 큰 부상을 입고 죽었다.[34] 김준용 묘명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오랑캐 장수 하나가 탄환에 맞아 죽었는데, 적군이 모두 통곡하였으므로 어떤 장수가 죽었는데 저처럼 통곡을 하는가 하고 괴이하게 여겼다. 나중에 한흥일(韓興一)이 청에 사신으로 가자, 청인들이 '동국과의 전쟁에서는 광교산의 전투가 가장 치열하여 백양고라(白羊高羅)가 죽었다.'라고 하였다. 백양고라라는 자는 관직이 높고 또 용략(勇略)이 있어 무오년에 요동을 함락시킨 자였다."[34]
화석예친왕(和硕豫親王, Hošoi Erke Cin Wang) 도도(多鐸, Dodo)가 양구리의 시신을 거두어 왔다.[34]《태종문황제실록(太宗文皇帝實錄)》 1637년 1월 8일 기사에 따르면, 숭덕제가 양구리의 시신을 마주 붙들고 곡하고 애통해하니, 신하가 누차 그만하시라 권하였으나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34]
숭덕 2년 정미일(1월 7일), 홍 타이는 이씨 조선의 증원 부대를 격퇴하기 위해 양구리에게 예친왕 도도와 함께 병사를 이끌고 맞이하러 가라는 명을 내렸다.[15] 악천후 속에서 겨우 적진을 찾아 습격 준비를 위해 도도에게 향했지만, 암굴에 숨어 있던 적의 패잔병에게 조총(화승총의 일종)으로 저격을 당해 중상을 입은 양구리는 그 자리에서 전사했다.[15] 향년 66세.[10]
적병은 밤 어둠을 틈타 도망쳤고, 다음 무신일(8일) 도도가 습격을 시작했을 때는 빈 껍데기였다.[16] 양구리의 유해가 옮겨지자 홍타이지는 통곡했다. 그리고 직접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관에는 황제의 어복인 흑담비 가죽으로 만든 의상 한 벌(구투모혁)이 들어갔다.[16]
3. 사후
1636년 병자호란에 참전한 양구리는 조선으로 들어와 남한산성으로 향하던 충청도 감사 정세규의 근왕군을 기습하여 험천 전투에서 최진립, 이상재, 김홍익 등 다수의 군관을 전사시키고 의병장 이민진을 포로로 잡아 참수했다.[34] 이후 전라도 병사 김준용의 전라도 근왕군을 요격하기 위해 광교산 전투에 참전하였다. 그러나 조선군의 거센 저항으로 첫 전투에서 대패하고, 재차 기습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격노한 양구리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조선군을 총공격하여 백병전을 벌였으나, 난전 중에 조선군의 저격을 받고 큰 부상을 입고 사망했다.[34]
김준용 묘명에는 "오랑캐 장수 하나가 탄환에 맞아 죽었는데, 적군이 모두 통곡하였으므로 어떤 장수가 죽었는데 저처럼 통곡을 하는가 하고 괴이하게 여겼다. 나중에 한흥일(韓興一)이 청에 사신으로 가자, 청인들이 '동국과의 전쟁에서는 광교산의 전투가 가장 치열하여 백양고라(白羊高羅)가 죽었다.'라고 하였다. 백양고라라는 자는 관직이 높고 또 용략(勇略)이 있어 무오년에 요동을 함락시킨 자였다."라는 기록이 있다.[34]
화석예친왕(和硕豫親王, Hošoi Erke Cin Wang) 도도가 양구리의 시신을 거두어왔다.[34] 《태종문황제실록(太宗文皇帝實錄)》 1637년 1월 8일 기사에 따르면, 숭덕제가 양구리의 시신을 마주 붙들고 곡하고 애통해하니, 신하가 누차 그만하시라 권하였으나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34]
1637년 11월, 양구리는 숭덕제에 의해 무훈왕(武勳王)으로 추봉(追封)되었고, 길에 비묘(碑墓)가 세워졌다.[35] 1700년 강희제는 양구리의 특출난 공적을 글로 써서 비를 건립하였고, 1731년 옹정제는 양우리 가족의 세작(世爵)을 일등영성공(一等英誠公)으로 정했다.[35] 양구리의 아들은 둘인데, 장남 아합단(阿哈旦)은 군공(軍功)으로써 타사라합번(拖沙喇哈番)을 제수받았고, 차남 탑첨(塔瞻)은 초품공(超品公)을 세습(襲)하고 내대신(內大臣, Dorgi Amban)에 발탁되었다.[35] 일등총병관(一等總兵官)을 역임하였던 무양공(武襄公) 렁거리(楞額禮, Lenggeri)는 그의 동생이었다.[35]
4.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부친 | 랑주(郎柱, 郎柱|lángzhù중국어) | 쿠르카 부 추장이었다. |
삼남 | 나무타이(納木泰, 納木泰|nàmùtài중국어) | |
첩 | 누르하치의 딸 | |
장남: 아하다[아합단](阿哈丹, 阿哈丹|āhādān중국어) - 참령 겸 좌령을 역임했다. | ||
손자 | 얼선[액이선](額爾蓀, 額爾蓀|éěrsūn중국어) | 아하다의 여섯째 아들이다. |
차남: 타잔[탑첨](塔瞻, 塔瞻|tǎzhān중국어) - 영시위내대신을 역임했다. | ||
손자 | 아이싱아[애성아](艾星阿, 艾星阿|àixīngā중국어) | 타잔의 아들. 영시위내대신, 정서장군을 역임했다. |
증손 | 푸샨[부선/복선](富善/福善, 富善|fùshàn중국어)[26] | 아이싱아의 아들. 의정대신, 영시위내태신을 역임했다. |
현손 | 하이긴[해금](海金, 海金|hǎijīn중국어) | 푸샨의 아들. 영시위내대신을 역임했다. |
내손 | 펑성어[풍성액](豐盛額, 豐盛額|fēngshèngé중국어) | 하이긴의 아들. 도통을 역임했다. |
곤손 | 펑간[풍안](豐安, 豐安|fēngān중국어) | 펑성어의 아들. 산질대신을 역임했다. |
증손부친 불명 | 정간[정감/정안](鄭甘/鄭安, 鄭甘|zhènggān중국어)[26] | 양구리의 증손. 푸샨의 동생.[26] 좌령을 역임했다. |
현손부친 불명 | 얼렁어[아릉액/액릉격](俄楞額/額楞格, 俄楞額|énggé중국어)[26] | 양구리의 현손. 하이긴의 동생.[26] 참령을 역임했다. |
내손 | 얼덩어[아이등아/액륵등액](俄爾登俄/額勒登額, 額勒登額|élèdēngé중국어)[26] | 얼렁어의 아들. 좌령을 역임했다. |
곤손 | 서옥 | 얼덩어의 아들.[26] |
딸이름 불명 | 누르하치의 11번째 아들 바부하이의 계처.[27] 타잔의 누이.[28] | |
족질 | 이얼더(이얼더|yīěrdé중국어) |
5. 평가
슈무루 양구리는 뛰어난 군사적 능력과 공적으로 명장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1619년 명나라 장수 두송과 마림의 군대를 격파하는 데 큰 공을 세웠고, 1636년 병자호란에 참전하여 험천 전투에서 최진립, 이상재, 김홍익 등 조선군 지휘관들을 전사시키고 의병장 이민진을 참수하는 등 큰 전과를 올렸다.[34]
그러나 광교산 전투에서 전라도 병사 김준용이 이끄는 조선군의 강한 저항에 부딪혀 첫 전투에서 패배하고, 이후 기습 작전도 실패하였다. 양구리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조선군을 총공격하여 백병전을 벌였으나, 난전 중에 조선군의 총탄에 맞아 큰 부상을 입고 전사했다.[34]
김준용의 묘명에는 "오랑캐 장수 하나가 탄환에 맞아 죽었는데, 적군이 모두 통곡하였으므로 어떤 장수가 죽었는데 저처럼 통곡을 하는가 하고 괴이하게 여겼다."라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그의 죽음은 청군에게 큰 충격이었다. 이후 청나라 사신으로 간 한흥일(韓興一)은 청인들로부터 "동국(조선)과의 전쟁에서는 광교산의 전투가 가장 치열하여 백양고라(白羊高羅)가 죽었다."라는 말을 들었는데, 백양고라는 관직이 높고 용맹과 지략이 뛰어나 1618년 요동을 함락시킨 자였다고 한다.[34]
숭덕제는 양구리의 시신을 붙들고 크게 슬퍼했으며, 신하들이 여러 번 권했음에도 슬픔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34] 이후 양구리는 무훈왕(武勳王)으로 추봉되었고, 그의 공적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졌다.[35]
6. 기타
슈무루 양구리는 청나라 초기의 명장으로, 병자호란 당시 조선에서 전사했다. 그의 죽음에 대해 여러 기록이 전해진다.
김준용 묘명에는 광교산 전투에서 조선군의 총탄에 맞아 죽은 "오랑캐 장수"가 양구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청나라 군인들은 "백양고라(白羊高羅)"가 죽었다고 슬퍼했는데, 이 백양고라가 바로 양구리를 가리킨다.[34]
숭덕제는 양구리의 시신을 끌어안고 매우 슬퍼했다고 전해진다. 신하들이 여러 번 그만두라고 권했지만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34]
양구리는 사후 숭덕제에 의해 무훈왕(武勳王)으로 추봉되었고, 길에 비석과 묘가 세워졌다. 1700년 강희제는 양구리의 공적을 기리는 비석을 다시 세웠다. 1731년 옹정제는 양구리 가문의 세작(世爵)을 일등영성공(一等英誠公)으로 정했다.[35]
양구리의 아들 아합단(阿哈旦)은 군공으로 타사라합번(拖沙喇哈番)을 제수받았고, 차남 탑첨(塔瞻)은 초품공(超品公)을 세습하고 내대신(內大臣, Dorgi Amban)에 발탁되었다.[35] 양구리의 동생 렁거리(楞額禮, Lenggeri)는 일등총병관(一等總兵官)을 역임하고 무양공(武襄公)에 봉해졌다.
누르하치의 차남 다이샨의 증손인 자오리엔은 자신의 저서 《소정잡록》에서 양구리를 외조부라고 기록했다.[29]
같은 책에서 자오리엔은 서원몽(徐元夢)을 양구리의 후예로 보고 있다. 서원몽은 옹정 연간의 중신으로, 양구리와 같은 슈무루 씨족이지만 출신지는 다르다.[32]
참조
[1]
서적
八旗滿洲氏族通譜
[2]
서적
國朝耆獻類徵初編
[3]
서적
清史稿
[4]
서적
太祖高皇帝實錄
[5]
서적
太宗文皇帝實錄
[6]
서적
太宗文皇帝實錄
[7]
서적
世宗憲皇帝實錄
[8]
서적
欽定八旗通志
https://zh.wikisourc[...]
[9]
서적
高宗純皇帝實錄
[10]
서적
國朝耆獻類徵初編
[11]
서적
八旗滿洲氏族通譜
https://zh.wikisourc[...]
[12]
서적
清史稿
https://zh.wikisourc[...]
[13]
서적
欽定八旗通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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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서적
太宗文皇帝實錄
[15]
서적
太宗文皇帝實錄
[16]
서적
太宗文皇帝實錄
[17]
서적
太宗文皇帝實錄
[18]
서적
太祖高皇帝實錄
[19]
서적
滿洲實錄
[20]
서적
滿洲實錄
[21]
서적
滿洲實錄
[22]
서적
滿洲實錄
[23]
서적
滿洲實錄
[24]
서적
滿洲實錄
[25]
서적
滿洲實錄
[26]
서적
欽定八旗通志
https://zh.wikisourc[...]
[27]
서적
愛新覺羅宗譜
http://www.axjlzp.co[...]
[28]
서적
太宗文皇帝實錄
[29]
서적
嘯亭雜錄
[30]
서적
愛新覺羅宗譜
http://www.axjlzp.co[...]
[31]
서적
八旗滿洲氏族通譜
https://zh.wikisourc[...]
[32]
서적
八旗滿洲氏族通譜
https://zh.wikisourc[...]
[33]
서적
嘯亭雜錄
https://zh.wikisourc[...]
[34]
문서
《태종문황제실록(太宗文皇帝實錄)》, ○戊申和碩豫親王多鐸率軍進擊朝鮮兵時敵已棄馬夜遁營內虛無人獲馬千一百有四十是日舁楊古利屍至
[35]
뉴스
《[[청사고]]》양고리 열전, 揚古利初事太祖,凡在行間,率先破敵,衝鋒挫銳,所向披靡。太宗誡不令臨陣,而遇敵忘軀,奮發不自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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